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교황령]]의 제5차 십자군 원정 ==== 당대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 중 한 명이었다. 그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으로 즉위해 92살에 선종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유럽에 도와달라고 요청한 장 1세의 호소에 교황은 자신의 특사인 로베르 드 쿠르콩(Robert de Courcon)에게 프랑스를 돌아다니며 모병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로베르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자들은 도둑, 나병 환자, 노인, 창녀, 여인 들로 이루어진 잡다한 무리였다.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잡것들이 준동한다며 항의 편지를 받자 인노첸시오는 로베르를 제지할 수 밖에 없었다. 교황은 십자군 모병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어했고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공의회에서 십자군의 목적은 이집트, 특히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로 정해졌고 서유럽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그 원정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교황청은 최대 절정기에 올라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원조가 준비되자 귀족들의 열의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다. 계획적이고 철저한 조직가였던 인노첸시오는 과거 살라흐 앗 딘이 그랬던 것처럼 신앙의 힘에만 의존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달했다. 참석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유럽 곳곳의 성당에는 교황의 포고 사본이 나붙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지극히 이성적이며 현실가였다. 그 당시 유럽 왕국 간의 반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억지로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이 함께 손잡고 공동 원정에 나가도록 착수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없었다. 대신 아이유브 제국의 알 아딜에게 대군이 가고 있는 중이니 순순히 살라흐 앗 딘이 강탈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넘기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편지를 쓸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교황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었으니 1216년 5월, 페루자에서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사제들이 교황의 쾌유를 위하여 돌아가며 올리던 중보기도도 아무런 소용없이 7월 16일에 교황이 선종하고 만다. 냉혹하고 기략이 절륜하며 젊음이 넘치듯 정열적인 그는 확실히 십자군의 구심점이었고, 그의 죽음으로써 생겨난 공백을 메울 만큼 동등한 매력을 지닌 지도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십자군은 계속해서 움직여야 했기에 콘클라베는 곧바로 소집되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모이는 십자군의 퀄리티는 실망스럽게 그지 없었는데, 스칸니나비아에서 온 딱할 정도로 얼마 안 되는 군사들과 아일랜드에서 온 소규모 병력이 레반트로 향했다. 그중에서 그나마 쓸만했던 주요 인물은 헝가리 왕국의 [[언드라시 2세]]였다. 언드라시 2세는 십자군을 이끄는데 괜찮은 인물이긴 했지만 한 가지 찝찝한 옵션이 붙어있는 왕이었는데, 자신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던 자다르가 4차 십자군에게 털렸던 경험이 있던지라 십자군을 좋아할 수가 없는 인물인데 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의 배후에는 다른 동기가 있었는데 자신의 왕비인 욜란다가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성립된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 1세와 친척 관계였고[* 정확히는 앙리 황제의 누나이자 앙리 황제 사후 라틴 제국의 섭정직에 오르는 욜란다의 딸이었다.] 때마침 자식이 없던 앙리 1세가 죽으면 계승권을 요구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앙리 등이 이끄는 군대도 있었는데, 이들은 개별적으로는 규모가 작았지만 함께 협력한다면 유용한 공헌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알 아딜은 이들이 동방에 도착하자 상륙이 마무리 되지 않았을 때 선제 공격을 할 요령으로 경기병을 보냈지만, 십자군이 생각보다 대규모인 것을 알고는 재빨리 후퇴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해묵은 문제로 인해 곤경을 겪었다. 각 파견단은 자신들의 지휘관의 명령에만 복종했으므로 겨우 조그만 도시 몇 개를 점령했을 뿐이었다. 강력한 통솔력이 그들을 이끌지 못하자 십자군은 곧바로 힘을 잃고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는 조그마한 도시 몇 개를 점령하고 혈통이 심각하게 의심스러운 몇 개의 해골을 자신의 수집품에 더하더니 십자군 종군이라는 위업 타이틀만 따고선 귀환해버렸다. 게다가 키프로스의 앙리는 세상을 떠나버리기까지 했다. 왕이 죽거나 떠나게 되자 그들을 따르던 기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원정은 시작부터 점차 시들해졌다. 다행히도 이것은 이집트를 목표로 하는 원정대의 선봉에 불과했다. 1218년 4월, 상당히 큰 프랑스 왕국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항해하려고 대기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대규모 프리지아(네덜란드) 함대가 우트르메르에 도착했다. 장 1세는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에 동의했는데, 이집트 함략은 곧바로 예루살렘 왕국의 옛 영토 수복의 전주곡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 아딜은 이집트가 누려왔던 평온함이 오랜 기간 계속되었기에 무사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어 그 위협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다. 헝가리의 유골 수집가가 그토록 많은 군세를 이끌고도 거의 아무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정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했다. 프랑크 군대가 오고 있다는 척후병에 대해 그가 보인 반응은 기껏해야 심드렁한 정도였다. 십자군 본대는 32,000명의 병력이었고, 1218년 5월 24일 프리지아 함대에 승선하여 아틀레를 출항했다. 그리고 도중에 식량을 비축하기 위하여 아틀릿(Atlit)에 들렀다. 아틀릿 성채는 당시에 서유럽 기사들이 보기에도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바다로 돌출한 갑 위에 지어져 그 성은 필요한 경우 물로 범람시킬 수 있는 도랑에 의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광대한 [[곶]] 지역이 성벽으로 둘려쳐져 있었으므로 군량을 비축할 수 있었고, 신선한 식수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성의 외벽은 두께가 무려 6미터였으며 높이는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크락크 데 슈발리에 성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15미터나 되었다. 이 성은 당시 십자군 국가의 건축술의 바로미터가 되는 건물이다. 각설하고, 척후선으로 소규모 배들이 이집트 다미에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십자군 척후선이 무역선으로 볼 정도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배에 승선하고 있던 십자군 기사들은 나머지 군대가 도착하기를 헛되이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해안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나일 강의 서쪽 제방에 상륙한 지 얼마 안 되어, 아틀릿에서 도착한, 장 1세와 트리폴리의 보에몽 4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 성전 기사단과 구호기사단,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헝가리로 이주해서 이번에 참가한 [[튜튼 기사단]]의 단장들을 태운 해군 전단이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미에타는 상류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반 세기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와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그곳을 공격했던 1169년의 역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를 함락시키려면 육지와 해안에서의 협공이 필수적이었다. 도시로 이르는 강은 동쪽 제방에서 서쪽 제방에 가깝게 위치한 탑에 걸려 있는 커다란 쇠줄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이 탑이 첫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1218년 8월 24일 더 높은 탑을 세우고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탑이 함락 되자 십자군은 불운하게도 힘겹게 해낸 작은 승리로 인해 십자군의 예봉이 꺽이기 시작했다. 다미에타의 함락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프리지아인들은 수송선으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여 귀환을 결정했고,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던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무엇인가 더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이들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한 아이유브 제국의 군대가 이미 시리아에서 진군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종군하던 알 아딜이 다미에타 성 앞 요격전에서 아이유브 군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알 아딜은 형인 살라흐 앗 딘처럼 영웅다운 면모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성공한 사람이었으며 유능한 지도자였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성공적으로 교섭을 이루어내자, 형으로부터 그 재능을 경계 받아, 형 살라흐 앗 딘이 생존하는 중에는 크게 중용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형의 사후, 형의 자식들에 의한 권력 투쟁이 발생하자 알 아딜은 여기에 교묘히 개입하여 형의 장남인 알 아프달을 추방시키고 1202년 술탄으로써 즉위했다. 그렇게 살라흐 앗 딘의 직계 자손들을 계승 구도에서 억지로 축출하니 정통성이 흔들렸는데 자신의 외교력과 정치력으로 불만을 잠재우고 있었다. 과거 유년 시절 [[리처드 1세]]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던, 이집트를 다스리던 그의 아들 알 아밀이 그의 자리를 바로 물려받았지만, 무슬림의 통합이 지속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유럽으로부터의 증원군이 마침내 오는 중이라는 확인과 함께 알 아딜의 사망 소식은 십자군 전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새로운 증원군은 펠라기우스(Pelagius)라는 꼬장꼬장하고 허풍이 심한 추기경에 의해 지휘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예루살렘의 구원자인듯 행동하면서 여왕과 사별하여 법률적 지위가 취약한 장 1세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 1세는 레반트의 정세를 잘 알고 있는 노련하고 유능한 지휘자였다. 1218년 10월 십자군은 무슬림의 반격보다 심각한 재앙에 시달렸다. 알 아딜의 죽음으로 다마스쿠스에서 오는 군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있었지만, 조금만 증원군이 늦었어도 지중해 바다에 모조리 수장되었을 정도로 굉장한 폭풍이 불며 바다에서부터 해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 해일이 저지대 위를 덮쳐 십자군 진지가 물에 잠기고 기사의 필수품인 말들이 빠져 죽었다. 범람한 바닷물과 썩어가는 물고기들의 악취로 결국 중세 시절 가장 무서운 재앙인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병자들의 피부는 검게 변해갔고 그 위세가 사그러질 무렵에는 2할의 병사가 목숨으르 잃고 난 후였다. 결국엔 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본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다미에타 외곽 공격을 명령했지만 폭우로 인해 실패하고 사기는 점점 떨어져갔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다미에타를 버렸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루머는 사실이었고 알 아밀은 자신의 승계 작업에 몰두하여 모든 군사들을 수도로 소집 명령을 내렸었다. 이로 인해 다미에타는 사실상 완전히 포위되었지만 하지만 반세기에 걸쳐서 부가 쌓인 다미에타는 식량이 충분했고 지리한 공성전만 계속되었다. 알 아밀은 자신의 계승이 험난해지자 외부의 공격을 외교로 풀려고 했다. 예루살렘을 프랑크인들에게 넘겨주자는 의견이 대두되자 주민들로서는 깜짝 놀랄 일인 성벽을 철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든건 십자군도 마찬가지었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여 떠나기로 마음먹고 지휘가 점차 공백이 되자 군대가 마음대로 판단하고 공방전에 돌입하여 진퇴를 결정하는 혼란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참패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장 1세와 군사 기사단의 규율 덕분이었다. 양측은 1219년 8월 29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때 한 사람이 진영에 찾아왔는데,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훗날 이시시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당시에도 이미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는데,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수사 일루미나토 한 명과 함께 순교할 각오를 하고 이집트의 술탄을 개종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무작정 왔었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수사와 더불어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체포되어 알 아밀 앞으로 끌려가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물들과 프란치스코의 초기 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후대에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들에서는 그가 술탄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고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가 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불 속에 들어가는 불의 심판을 행했다고 전하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주저함이 없이 불 속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며,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13세기 말엽 조토에 의해 아시시에 있는 대성당에 프레스코화로 묘사되어 있다. 몇몇 후기 문헌들에 의하면, 술탄은 프란치스코에게 성지에 있는 거룩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은 물론 그곳에서 무슬림들에게 설교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온갖 부유함에 둘러싸여 있던 그들로서는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 인물인 것 같은데 허름한 넝마를 걸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알 아밀은 술탄 자리를 승계받아서 십자군과 적대를 했을 뿐 사실은 가톨릭에 상당히 공감을 하는 인물이었다고 여겨진다. 불의 심판 기적이 성공해서인지는 몰라도 알 아밀은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인지 자비인지 값나가는 선물들을 챙겨줬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렸고 술탄은 그렇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의 야영지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와 그와 동행한 수사는 1220년 후반에 아크레에 있는 십자군 주둔지를 떠나 이탈리아행 배에 승선하였다. 그러한 해프닝이 있은 후 한 십자군의 포로가 석방되어 십자군과 휴전을 제의하기 위해 보내졌고 그들도 휴전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알 카밀이 아주 특이한 제의를 해오자 혼란스러워했다. 이집트를 떠나면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나사렛을 양도하겠다는 것이다. 언뜻보면 좋은 제안이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동의하지 않게되었다. 펠리시우스는 이슬람과 교섭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이라 여겼고, 기사단은 성벽이 허물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벙어할 수가 없고, 우트레주르뎅의 완충지대가 없이는 그 3곳을 방어하기 불가능했기에 반대했다. 십자군 참가자들은 전리품으로 다미에타의 막대한 재산을 포기할수 없었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원인에서는 완전히 제각각이었지만 모든 각도에서 나온 최후의 결론은 동일했다. 협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결렬되었다. 11월 4일 소규모 십자군이 도시의 외곽을 순찰하다 성벽에 병사들이 아무도 없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들은 다미에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몰랐다. 다음날 공성전을 준비하여 진격했는데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성으로 난입해 들어갔을 때 방어군 거의 전원이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량은 넘쳤지만 질병에 굴복한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자신이 다미에타를 통치할려고 했지만 결국 장 1세가 독일의 프리드리히 황제가 도착할 때까지 임시로 통치하기로 정해졌다. 이 다툼 뒤에 휴식의 기간이 이어졌다. 장 1세는 소 아르메니아의 왕위와 관련된 논쟁에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려고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했다. 장 1세는 아르메니아의 공주와의 재혼을 통해 계승권을 물려받았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온 직후 아르메니아의 공주가 모호한 상황에서 죽었다. 공주가 의붓딸 [[이사벨 2세(예루살렘 왕국)|이사벨 2세]]를 학대하여 장이 심하게 때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공주가 죽자 며칠 뒤 공주의 어린 아들이 그 뒤를 잇게 되고, 장 1세는 아르메니아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가 없어졌지만 이집트 전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년 내내 십자군은 다미에타에 머물러 있었고 각 세력의 알력이 자자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귀환했다. 펠라기우스는 교황이 직접 황제의 관을 씌워준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를 기다렸지만 출발 할거라는 말만 있을뿐 다음 소식이 없었다. 결국 펠라기우스 혼자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지만 군대는 장 1세가 돌아오지 않는 한 공세를 취하기를 꺼렸다. 그래도 1년동안 증원군은 꾸준히 모였고 연대기 작가들은 630여 척의 배와 5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들의 판에 박힌 과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느 참으로 굉장한 대군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장이 1220년 8월에 도착하자 펠라기우스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장이 도착한 시기는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였다. 장은 범람을 알기에 카이로를 24킬로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그만 멈출 것을 권고했다. 펠라기우스는 계속 공격을 고집했고, 그 와중 무슬림 군대가 뒤를 차단했다. 그렇게 나일 강은 범람했고 이집트 함대는 강을 따라 십자군을 포위했다. 그러자 곧바로 펠라기우스의 자신감은 공포로 바뀌었고 바이에른 공작은 후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일반 병사들은 비축품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참을수 없어 하여 그 와중에 막대한 양의 포도주를 다마셔버렸다. 기사단은 보급품을 무슬림에게 빼앗기느니 불을 태워버렸고 이런 행동은 적들에게 퇴각이 진행 중이라는 확실한 메시지였다. 곧바로 수문을 열어 십자군 진영을 쓸어버렸고 혼란통에 단 몇 척의 배만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배에는 모든 의약 보급품이 실려 있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탈출이란 있을 수 없었고 항복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수많은 십자군 포로들을 보며 굴욕감을 느끼며 화평을 제의했다. 알 카밀은 다미에타 양도와 8년 동안의 휴전을 주장했다. 대신, 자신이 갖고 있던 [[성십자가]]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조건을 이행할 시기가 도래했을 때, 그것은 사라지고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무슬림들에게는 매우 하찮은 것이었으므로 제대로 간수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하며 상징적이고 성스러운 유물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제 5차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성공에 다가선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불화 때문에 또다시 아무것도 건진게 없었다. 십자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솔력이 필요로 했지만 펠라기우스는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서유럽에서 온 자들이 우트르메르인들의 지역에 관한 지식에 귀기울였으면 나일 강의 범람이 임박한 시점에 카이로로 진격하는 무모한 짓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레반트에 거대한 패러다임이 닥치기 시작했다. 바로 무관심이었다. 서유럽의 많은 지도자들이 그토록 많은 노력과 자원을 쏟아 붇고도 얻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러한 원정에 매달려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이제 따져 묻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